과거 인도양에서 활동했던 해적이야기

돌발47 2024-10-16 오후 3:27:15

동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활동한 여러 해적들이 존재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 명의 해적, 토마스 틔워와 헨리 에버리는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그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이 두 해적의 삶과 그들이 남긴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틔워는 대항해 시대 동안 가장 많은 금은보화를 약탈한 해적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그의 출생 배경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로드아일랜드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린 시절부터 바다에 대한 꿈을 키워왔습니다. 2년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던 시기에 그는 버뮤다로 건너가 4백성 선언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캐나다로 향하는 프랑스 선박을 약탈하며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692년, 그는 버뮤다 총독으로부터 해적 면허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해적 생활에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의 후원자들은 그에게 해적 활동을 지원하며 자금을 뒷받침했습니다. 틔워는 이 기회를 잡고 즉시 바다로 출발했습니다. 그는 약탈한 금은보화로 다른 상선과 아프리카의 프랑스 노예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이는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1691년, 토마스 틔워는 버뮤다에서 출발한 다른 배와 함께 서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프랑스 정착지를 약탈하는 것이었고, 이들은 영국의 국영 회사인 왕립 아프리카 회사와 협력하여 정착지를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서플리카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함께 하던 배와 헤어지게 되었고, 이 상황에서 틔워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틔워는 배에 있는 선원들을 한곳에 모아 해적이 되기를 제안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그는 정부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보다 약탈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주장하며, 선원들에게 해적이 되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선원들은 그의 제안을 심사숙고한 끝에, 결국 그와 함께 해적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들은 1억 청적을 목표로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양으로 향한 토마스 틔워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잠시 머물다가, 북쪽으로 더 이동하여 아덴만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홍해와 아덴만을 연결하는 바브 엘 만데브 해협에서 아랍 상선을 공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상선에는 약 300여 명의 군인이 탑승하고 있었으나, 틔워의 선원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전투 방식과 대담한 행동은 그를 더욱 악명 높은 해적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토마스 틔워는 단기간에 큰 부를 축적했지만, 그의 해적 생활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해적의 삶이 가진 위험과 모험, 그리고 그로 인해 맞이하는 결말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줍니다. 다음 영상에서는 헨리 에버리의 이야기도 함께 살펴보며, 이 두 해적의 삶의 교차점을 더 깊이 있게 탐구해 보겠습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약탈이 아닌,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배에는 타와 향, 16우솝 비단 등 다양한 귀중한 식품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들을 제외한 후 내가 찜한 해적의 가치도 약 1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당시 10만 파운드는 오늘날 가치로 약 1억 원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으로, 이는 해적의 삶이 얼마나 풍족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렇듯 많은 금액이 배분되었고, 사람들은 1인당 천 200파운드에서 많게는 3천 파운드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특히, 토머스 틔워는 약 8천 파운드를 가져갔는데, 이는 그의 지도력과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증명하는 수치입니다. 그는 단 한 번의 약탈로 현금을 175억 원 넘게 얻었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약탈하고 싶었던 그는 해적 동료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토머스 틔워가 인도양에서의 성공적인 약탈 소문은 해적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 많은 해적들이 그를 따라 인도양으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도양은 해적들의 새로운 약탈의 무대가 되었고, 해적의 시대는 더욱더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1694년, 토머스 틔워는 드디어 뉴포트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귀환은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급료를 지급하며 해산시켰고, 약탈한 물품을 처분한 뒤 뉴포트 해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후원자들에게는 돼지와 같은 화려한 연회를 베풀며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이 연회는 단순한 식사 자리를 넘어서, 자신과 협력 관계에 있는 이들을 매수해 자신을 보호받게 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회 최상층과 교류하며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고, 이런 상류층과의 연결은 그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여정은 이렇게 평화롭게 끝나는가 싶었지만, 그 뒤에는 또 다른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톰 오스틴이 총독 벤저민 플래터를 만났습니다. 이 벤저민 플레이어는 윌리엄 키드를 후원했던 총독의 전임자로, 해적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톰 오스틴은 클래식한 만남을 가진 틔워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털어놓으며 친해졌고,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해적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던 틔워는 다시 해적질을 하기 위해 인도양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벤저민은 기꺼이 그에게 해적 면허를 발급해주었고, 이는 틔워가 다시 해적의 길로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1694년 11월, 토머스 틔워는 다시 이전에 탔던 배와 동일한 배를 타고 인도양을 향해 떠났습니다. 약 30명에서 40명의 승무원이 탑승해 있었지만,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후 승무원을 50명에서 60명으로 늘리고 인근 해역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양한 해적들과 접촉하며, 그들의 경험과 지식을 배우고 자신의 작전 계획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습니다. 1695년 9월, 그는 과거에 크게 약탈했던 홍해의 입구인 바브 엘 만데브 해협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해적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지역으로, 틔워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전투력을 시험하고 새로운 보물을 찾기 위한 모험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박은 당시 인도양에서의 무역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그 중요성 때문에 많은 해적들이 노리고 있던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랍 선박은 예상과 달리 강력하게 저항했고, 전투 과정에서 토머스 틔워는 날아오는 포탄에 복부를 맞고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선원들은 선장이 뜯어진 모습을 보고 공포에 휩싸였고, 각자 도망치고 싶었지만, 거의 저항을 하지 못한 채 모두 붙잡혔습니다. 이 사건은 해적들이 단순한 약탈자가 아니라, 치명적인 전투를 벌이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습니다. 한편, 헨리 에버리는 인도양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해적 중 한 명으로, 그는 '대해 정' 혹은 '해더 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불과 2년밖에 활동하지 않았지만 황금기 해적들 중 가장 성공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첫 기록은 1690년대 초에 등장하며, 당시 그는 무어가의 노예무역 선장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노예무역이 국가의 독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개인이 몰래 무역을 한다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었습니다. 헨리 에버리는 이러한 점을 활용하여 1693년까지 SM용품활동하며 많은 이익을 챙겼습니다. 그의 해적 활동 시작은 남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란산 무역선에서 영국인들로 구성된 선원들과 함께 근무했지만, 스페인 선박에 대한 강탈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항 지연과 임금 문제 등으로 인해 선원들의 불만이 가득 차 있었고, 이러한 불만은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에버리는 몇몇 선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고, 여러 함선을 오가며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해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1694년 5월 7일 밤, 그들의 함대의 제독이 해변가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에버리와 그의 동료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성공적으로 제독을 제거했습니다. 이후 헨리 에버리는 1등 회사가 탑승하고 있던 '헨리 2세' 호에서 만장일치로 선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에버리는 무역선에서의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선원들은 그가 돈을 벌어줄 것이라고 믿었고, 그의 하트 민 출신이라는 배경 덕분에 모두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에버리가 단순한 해적이 아닌, 한 명의 리더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선장이 된 에버리는 선원들에게 인도양으로 가서 크게 한 몫 해보자고 권유했습니다. 이때 그는 토머스 틔워의 성공 사례를 언급하며 그들을 설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선원들은 에버리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들은 빼앗은 상대의 이름을 펜싱으로 고쳐 부르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그들이 단순히 약탈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합니다. 이처럼 헨리 에버리는 기존의 해적 문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적 생활을 시작하며, 인도양에서의 활동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는 당시 해적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해적의 매력과 위험이 뒤섞인 복잡한 현실을 드러냅니다. 헨리 에버리는 인도양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여정은 단순한 항해가 아닌, 모험과 범죄의 서사시로 가득 찬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인도양으로 향하는 도중 서아프리카의 카보베르데 근처에서 바베이도스에서 건너온 영국 상선의 약탈을 통해 해적의 길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해적 인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습니다. 당시 상선에서 일하던 9명의 선원들은 에버리의 유혹에 넘어가 그의 해적선에 합류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해적 세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에버리는 인도양으로 향하면서 여러 차례 해적질을 하며 자신들을 상인으로 가장하여 지역의 족장들과 그 부하들을 속여 재산을 빼앗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헨리 에버리는 그곳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다시 근처에서 활동 중인 프랑스 선박들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영국 해군 지휘관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은 영국 선박을 공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 편지가 영국 지휘관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은 자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버리는 자신들을 공격할 경우에는 강력한 반격을 하겠다고 경고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했습니다. 그 다음, 에버리는 홍해로 향했습니다. 그는 이미 많은 해적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기회로 삼아 더 큰 계획을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있던 여러 해적들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해적 연합을 결성하였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인도와 중동으로 가는 무장 곡물 선단을 약탈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특산품을 팔고 돌아오는 보물선은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판단했던 에버리는, 이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행될 경우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부와 명성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에버리의 계획은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도의 보물선이 해저에서 발견되자마자 다른 해적들이 이 기회를 놓칠세라 도망가 버렸고, 에버리의 선단은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져 보물선을 놓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보물선을 추적했습니다. 그러던 중 가까운 곳에서 두 척의 보물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선박은 순식간에 나포되었고, 다른 한 척은 치열한 전투 끝에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결국, 에버리가 탄 배는 무굴 제국 황제 소유의 보물선으로, 그 안에는 당시 돈으로 약 60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막대한 재산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보물선의 약탈은 에버리에게 해적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을 안겨주었고, 그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에버리는 부와 명성을 가진 해적이 되었으며, 인도양의 해적 세계에서 더욱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의 해적 생활은 단순한 약탈을 넘어, 동맹과 함께하는 모험, 그리고 그로 인해 맞이하는 위험과 도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에버리는 인도양에서 모은 금은보화를 통해 자신의 해적 선단의 모든 선원들에게 각각 약 천 파운드가 넘는 돈을 나눠 줄 수 있었습니다. 1000 파운드는 2010년 기준으로 약 2억 7000만 원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당시 해적들에게는 엄청난 재산이었습니다. 에버리와 그의 선원들은 이 외에도 더 많은 돈을 챙겼고, 그들은 이번 약탈의 성공을 통해 해적 사회에서 더욱 강력한 동맹 선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공은 에버리가 카리브해의 바하마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하마에 도착한 에버리는 총독에게 뇌물을 주었고, 뇌물을 받은 총독은 그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는 해적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며, 에버리는 이를 통해 자신의 신변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원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며 그들을 회상시켰고, 이렇게 지급된 급료는 많은 선원들이 해적 생활을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적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일부는 결국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에버리는 해적질로 얻은 재산을 모두 챙겨 아일랜드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유유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삶은 신비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일랜드로 떠난 후 그의 삶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해적 생활을 은퇴한 인물이 되었고, 이는 버커니어였던 헨리 모건 경 이후 처음으로 엄청난 부를 얻고도 잡히지 않은 유일한 해적이었습니다. 에버리의 성공은 그의 해적 생활을 장식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지만, 그가 남긴 전설은 단순한 해적 이야기 이상이었습니다. 토머스 틔워와 헨리 에버리는 동시대에 활동한 해적들이었습니다. 둘 다 짧은 기간 동안 해적 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크게 성공한 인물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토머스 틔워는 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생을 마감했고, 반면 헨리 에버리는 약탈한 돈을 들고 아일랜드로 떠나 남은 여생을 조용히 보냈습니다. 이러한 대조적인 운명은 해적 생활의 불확실성과 위험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들은 서로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각기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에버리의 이야기는 해적의 삶이 가진 매력과 위험, 그리고 그로 인해 맞이하는 운명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줍니다. 그가 남긴 전설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으며, 해적이라는 존재의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로 여겨집니다. 에버리의 삶은 단순한 범죄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선택,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의 전설은 후세에 걸쳐 해적이라는 존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이는 사람들에게 해적들의 복잡한 심리와 그들이 맞이한 운명의 아이러니를 상기시킵니다.

공자, 누구나 쉽고 간단하게 이해하기

동양역사보고 (2023-11-04 오후 1:37:37)

공자가 36살이 되던 해에는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표에 대해 고민하였습니다. 그가 떠올린 질문 중 하나는 "나는 왕을 도와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공자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며 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왕을 찾아가 그들에게 세상을 바로잡는 방법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상적인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공자의 생각이 이상하다고 느꼈고,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고수하며 왕을 찾아 다니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방법을 계속 제안하였습니다. 그의 끈질긴 노력은 결국 성공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공자는 다른 나라를 방문하며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의 사상은 '유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 사상은 그 후로 수 천 년 동안 중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전에 그의 생각을 완전히 실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생각은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공자는 왕을 찾아다니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의 생각은 그 후 수 천 년 동안 중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유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세상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의 사상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공자는 36세 때 제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여기서 많은 것을 배우고, 몇 년 후에는 다시 노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정치에 깊이 관여하기보다는 교육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는 교육 체계를 정리하고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50세가 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나라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사고의 직책에 오르게 되어 나라를 안정화시키고 외교에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귀족 인사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나라의 모략으로 인해 노나라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공자는 이런 상황을 보고 노나라를 떠나 천하 유세를 결심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려 했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그를 등용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들은 덕을 펼치는 것보다 군사력을 강화하고 부를 늘리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배고픔에 시달려 죽을 뻔한 일도 있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14년간의 유세 활동이 끝나고 69세에 노나라로 돌아온 그는 남은 생을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남은 생애는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그의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자 자신도 병에 걸렸고, 그의 가장 친한 제자인 자로가 별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7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자는 세상이 혼란에 빠진 이유가 신분 질서가 망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사상인 '정명사상'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평화롭고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공자는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주는 마음이 넘치는 사회, 즉 대동사회를 이루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덕이 많은 사람을 '군자'로, 그렇지 못한 사람을 '소인'으로 구분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가 인간 중심의 사상을 펼쳤다는 것입니다. 그는 천명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보다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데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공자의 사상의 핵심은 '인'과 '예'입니다. 인은 인간성을, 예는 예의를 의미합니다. 그는 인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습니다. 그는 인을 일관되게 정의하지 않았지만, 인류의 본질을 강조한 인간 중심 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자는 인간의 삶을 우선시하고, 귀신이나 하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우선시하고, 귀신은 존중하되 일정한 거리를 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귀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늘에 대한 의지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을 해치거나 방해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현실에서 증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개념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성리학처럼 추상적 개념을 적극 사용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공자는 하늘을 도덕적 원칙으로 보았습니다. 하늘이 내려주는 도덕성, 즉 '천리'를 인간이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인간의 도덕성을 해치거나 방해하는 것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인간의 도덕성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었습니다. 공자는 인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서'라는 개념을 말하며,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의 핵심 원칙으로, 평생 실천해야 할 덕목입니다. 또한 서로를 신뢰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도리를 지키는 것도 인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자세입니다. 예는 인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공자는 예를 간소하게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했으며, 형식보다는 진실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을 경계하며, 예는 사치스럽게 보이기보다는 검소하고 진실한 마음을 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자는 예가 사회규범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간의 외교에서 예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악(음악)은 사회에서 조화를 이루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는 예를 지나치게 배척하는 것도 경계하며, 사회에는 최소한의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자가 제자에게 가르친 것처럼, 인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극기봉예'라고 합니다. 즉, 공자의 사상에서 인을 실현하려면 예가 필요하며, 예는 자신의 진실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핵심 사상입니다. 공자는 '온고지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과거의 지식을 배우며 동시에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닌, 과거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은 받아들이는 동시에 나쁜 것은 배제하는 평가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공자의 이러한 생각은 그가 일률적인 순응이나 관습을 비판하고, 미신이나 무의미한 종교적인 신념을 멀리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공자의 교육관에 따르면, 교육은 모든 사람이 고르게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크게 파격적인 생각이었으며, 그의 이러한 생각은 사회적 계층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교육의 기회를 공정하게 제공하자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는 신분이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교육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공자를 이어받은 주요한 유가 사상가로는 맹자와 순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공자와 같은 유가의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맹자는 이상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순자는 현실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송대의 성리학자들은 맹자의 사상을 계승하며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지만, 순자의 사상은 대부분 무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자의 원형적인 사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순자와 같은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공자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공자의 사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은 그의 생각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대 아시리아 역사

역사라이더스 (2023-11-04 오전 9:41:49)

아시리아는 고대의 강대한 제국 중 하나로, 기원전 2450년부터 기원전 609년까지 존재하였습니다. 이 제국은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후기 철기 시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며, 그 역사를 초기 아시리아, 고아시리아, 중앙 아시리아, 신아시리아로 나누어 이해합니다. 이 중에서 신아시리아 시기에는 철제 무기와 기마병, 그리고 최초의 정규군 편성으로 빠르게 주변 국가를 점령하였습니다. 초기 아시리아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기원전 2500년경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수발과 샘족 유목민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남부 수메르 도시 문화의 영향을 받아 아수르라는 도시를 세웠습니다. 이 지역은 샘족이 세운 아카데 왕국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풍습과 신앙이 샘족화 되었습니다. 아시리아인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아수르라고 부르며 태양신 아수르를 수호신으로 섬겼고, 중개무역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아시리아는 이러한 중개무역을 통해 급속히 성장하였고, 기원전 19세기 말 샴시 아다드 1세가 처음으로 아시리아를 정치적으로 통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 이후로 아시리아는 침체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침체기를 벗어나 아시리아가 다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슈르 우발리트 1세 시기입니다. 그는 히타이트와 손잡고 미타니를 공격하여 독립을 이뤄냈고, 그의 후임 왕들은 아시리아의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신아시리아 시기가 시작되었고, 이 시기에 아시리아는 '공포 통치'와 '문화 통치'를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잔혹한 통치로 유명한 왕으로, 그의 시기에 아시리아의 이미지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국가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그의 잔혹한 통치와 문화적 융성을 위한 노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점령한 국가가 다시는 반란을 꿈꾸지 못하도록 공포심을 조장하면서도, 문화적 융성을 위해 아수르와 바빌론을 보전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새로운 수도 님루드를 개척하며 거기에 궁전과 성벽을 세우고 세계 각지의 식물과 동물로 채워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강성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세르하돈 3세 이후로 내분과 속국들의 반란으로 인해 아시리아는 쇠퇴하였습니다. 특히 우라르투의 등장은 아시리아에 큰 압박을 주었지만, 이는 아시리아가 다시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티글라트필레셀 3세는 군사 쿠데타로 즉위한 이후 대규모 군사 개혁을 통해 아시리아를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직업 군인인 대규모 상비군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전투복과 철제 무기를 지급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기병의 강점을 알아보고 대규모 기마병단을 창설하여 기동성과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티글라트필레셀 3세의 이러한 군사 개혁은 아시리아의 군사력을 한층 강화시켰고, 이는 아시리아가 그 이후의 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티글라트필레셀 3세는 아시리아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우라르투와 북시리아 동맹의 중심도시인 아르파데를 점령하고, 북이스라엘 왕국과 다마스쿠스의 반란을 진압하였습니다. 또한, 바빌로니아와의 평화조약을 깨고 바빌론을 점령하여 스스로 바빌론 왕을 칭하였습니다. 그의 정치적 신념은 중앙 집권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그는 강제 이주 정책을 실시하여 아시리아의 영향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아시리아의 민족성을 강화하고, 점령지의 반란 가능성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급격한 성장은 주변의 강대국들로부터 반발을 샀습니다. 이들 국가들은 아시리아의 속국들에게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여 아시리아에 대한 반란을 부추기는 전략을 선택하였습니다. 티글라트필레셀 3세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샬마네셀 5세는 이스라엘의 반란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그는 사망하여 아시리아의 왕위는 사르곤 2세에게 전해졌습니다. 사르곤 2세는 자신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아시리아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시리아는 급격히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아시리아의 오랜 라이벌인 우라르투를 공격하여 그들의 국경을 침범하였고, 결국 우라르투를 몰락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퀸메르인과 스키타이인과 같은 민족들이 서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르곤 2세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세나케리브가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세나케리브는 아시리아의 수도를 두루샤루킨에서 니네베로 옮기는 결정을 내리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시리아는 여러 반란을 진압해야 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칼데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세나케리브는 이를 진압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데아인들의 지도자 메로다크 발라단은 다시금 엘람으로 도망쳤습니다. 메로다크 발라단은 아시리아에 대한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주변 국가들을 선동하였고, 이로 인해 이집트는 시리아와 가나안 지방의 반란을 지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나케리브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쪽으로 원정을 떠났고, 이 과정에서 유다 왕국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성서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나케리브의 군대는 예루살렘과 라키스를 포위하였고, 예루살렘의 왕 히즈키야는 아시리아를 달래기 위해 성문에 가까운 곳에 은과 금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나케리브는 이를 무시하고 공세를 강화하였습니다. 이에 히즈키야는 군비를 증강하여 대항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때 세나케리브의 전령이 예루살렘 성벽 앞으로 나타나 온갖 악행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들은 성서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 시기의 아시리아와 유다 왕국의 전쟁은 많은 예술 작품에서도 다루어졌습니다. 세나케리브의 죽음 이후 그의 막내 아들인 애사르하돈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형제들과의 경쟁과 분란을 뛰어넘어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아 아시리아 왕국을 이끄는 데 성공한 것을 의미했습니다. 애사르하돈은 왕위를 계승한 후 가장 먼저 진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 세나케리브가 파괴한 바빌론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재건 작업은 그의 군주로서의 능력을 입증하는 동시에, 바빌로니아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애사르하돈은 바빌로니아인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이는 그의 통치를 더욱 강화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사르하돈의 계획은 그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다음으로 가나안과 시리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던 이집트를 점령하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 때 이집트는 신왕국이 멸망한 후의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리비아 이집트기의 소왕국들이 난립하는 제3 중간기였습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되찾아낸 것은 쿠시 왕국이 세운 제25 왕조였습니다. 애사르하돈은 이집트를 점령하기 위해 아시리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사 원정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는 그의 지배력과 통치력을 더욱 강화하며, 그의 왕위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세나케리브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들 중 둘째와 셋째가 왕위를 둘러싸고 분란을 일으켰지만, 애사르하돈은 이들을 빠르게 진압하여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 애사르하돈은 아시리아의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아시리아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애사르하돈의 죽음 이후 아시리아 왕위를 계승한 아슈르바니팔은 아시리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애사르하돈의 이집트 정복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기원전 667년에 이집트 파병을 감행하였습니다. 이 원정은 제국의 속국들에서 차출한 모든 군사력을 동원한 엄청난 규모였고, 이로써 이집트 파라오 타하르카를 다시 남쪽으로 쫓아냈습니다. 아시리아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남쪽의 핵심 도시 타니스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이로써 이집트 전역을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고, 아시리아는 이집트를 본토로 보유한 최초의 왕국이 되었습니다. 아슈르바니팔은 지식에 대한 열망이 강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언어를 공부하고 고전을 섭렵하였으며, 수메르어, 아카드어 등 다양한 언어의 점토판 문서들을 제국 전역에서 수집하였습니다. 그리고 니네베에 세계 최초로 장서를 체계적으로 분류한 도서관을 세웠습니다. 아슈르바니팔의 잔혹한 허세는 그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궁궐에서 부인과 함께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과 함께, 사자 사냥과 같은 위험한 스포츠를 통해 자신의 용맹함을 과시하였습니다. 그의 궁궐에서 발견된 부조에는 자신이 사자를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이는 그의 용감함을 상징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아슈르바니팔은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아시리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넓은 영토를 차지한 정복군주이자, 동시에 문화군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 아시리아는 문화와 군사력 모두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나보폴라사르와 키아크사레스는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기 위해 손을 잡기로 합니다. 이들은 함께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공격하며, 이 공격은 기원전 612년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니네베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아시리아는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수르-우발리트 2세는 이집트 파라오의 도움을 청하며, 하란으로 도망갔지만, 결국 미디야와 바빌로니아의 연합군에게 패배하게 됩니다. 이로써 아시리아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나보폴라사르와 키아크사레스의 연합은 아시리아의 멸망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나보폴라사르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키아크사레스의 딸과 결혼하며, 이 두 나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이렇게 바빌로니아와 미디야는 아시리아의 공백을 채우며, 이 지역의 신규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국제 정치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아시리아의 멸망 이후, 이 지역은 바빌로니아와 메디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이는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아시리아인들은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후손이며, 그들은 크리스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리아인들은 중동의 여러 국가, 즉 이라크, 이란, 터키, 시리아 등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아시리아인들은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요소들을 강조합니다. 그들의 언어는 고대 아시리아 언어의 후손이며, 이 언어는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 행사와 축제를 열며, 이를 통해 그들의 문화 유산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리아인들은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주장하는 조직들로부터 그들의 안전이 위협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 조직은 아시리아인들이 그들의 신앙과 문화를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며, 이로 인해 그들은 종종 그들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인들은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려고 노력하며, 이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그들의 문화를 보존하려고 합니다. 이런 노력은 아시리아인이라는 민족의 존재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그들은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고 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리아인들은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려고 노력하며, 이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그들의 문화를 보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아시리아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다음 세대에게도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헌신은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되며, 이를 통해 그들은 그들의 존재를 더욱 강화하고 그들의 문화를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왕건 보다 앞서 고려를 건국한 궁예

역사메니아 (2023-11-03 오후 8:38:16)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의 아버지는 신라의 47대 왕인 혼하나이며, 어머니는 허나라는 훈위원후의 딸이지만 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른 설에는 48대 왕 경문이 궁예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궁예는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로 흰 빛과 무지개가 하늘로 이어지는 듯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점을 주는 관리인 일관과 이관에게 전문가가 이 아이는 주무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치아가 있었고, 또한 하늘의 이상한 형태의 빛과 불꽃이 나타났다며 그는 장차 나라를 이롭게 하지 않을 것이니 기르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은 공중이사에게 명하여 궁예를 죽이게 했지만, 병사들이 어린 궁예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 누마로 아래로 던졌을 때, 유모가 그를 받아내어 살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유모의 손가락이 궁예의 한쪽 눈을 찔러 궁예는 눈이 멀었습니다. 유모는 궁예를 데리고 도망쳐 숨어살며 힘들게 그를 키웠습니다. 하지만 궁예가 나이 10세가 되도록 장난을 그치지 않아, 유모는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궁예는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렸고,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승려가 되어 자신의 법명을 천종이라 지었고, 철저하게 서리를 지켰지만, 승려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상은 활발하고 담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한번은 궁예가 '재'라는 불교 의식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국내가 알고 있던 까마귀가 입에 물고 있던 물건을 국내에게 떨어뜨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까마귀가 떨어뜨린 것은 상아로 만든 조각이었고, 그 위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궁예는 이것을 비밀로 하고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큰 자부심을 얻었다고 합니다. 당시 신라는 정치가 잘못 행해져 백성들이 흩어진 상태였고, 주연들 중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반 이상이었습니다. 도적들이 많이 생겨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궁예는 이를 이용해 무리를 끌어 모으고 자신의 큰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890년, 궁예는 쭈지 지역의 도적 우두머리인 기원에게 몸을 바치게 되었지만, 기원은 궁예를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며 그에게 예우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궁예는 마음이 답답하고 스스로 불안해져서 기원의 보병들과 비밀리에 결탁하였습니다. 결국 궁예는 기원을 버리고 북원의 도적인 양길에게 휘하에 들어갔습니다. 양길은 궁예를 우대하고 이를 맡겼으며, 궁예에게 병사를 나눠주어 동쪽 땅들을 공략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로써 궁예는 처음으로 자신만의 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894년, 궁예는 명주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고, 그의 휘하에는 35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아 모든 사람들로부터 두려움과 경외를 받았고, 결국 그를 장군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장군이 된 궁예는 계속해서 영토 확장을 이어갔고, 이번에는 쳐져성, 천구약, 금성, 철원 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습니다. 그의 세력은 점차 늘어났고, 그 때문에 지역의 도적들까지 몰려와 궁예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이처럼 궁예의 거느린 병사 수는 점차 증가하였습니다. 궁예는 나라를 세울 정도의 세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일단은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는 것에서 멈추었습니다.897년, 북원에 위치한 양길이 궁예가 자신보다 더 넓은 지역을 다스리고 있고 더 많은 백성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극도로 화를 내어 군사를 동원해 궁예를 습격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궁예는 이를 미리 알아내 천재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송악에 호조한 왕건의 아버지인 광유는 궁예에게 항복해 왔기 때문에, 궁예는 송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897년에는 송악을 기반으로 활동하였고, 왕건에게 정복사업을 맡겼습니다. 901년, 궁예는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르며 신라가 박나라의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905년, 궁예는 신라를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이 후안하는 사람이라도 모두 죽여버렸습니다.904년, 궁예는 후국을 마라라고 부르고 연해를 무탈라고 칭하였습니다. 또한 여러 관직을 설치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청주의 주민 1000명을 철원 지역으로 이동시켰습니다. 905년 후에는 철원을 도읍으로 삼아 거기에서 새로운 궁궐과 우대를 건축하였으며, 그의 사치는 극에 달했습니다. 연해를 무탈에서 성책으로 바꾸었습니다. 911년, 궁예는 후국을 마라로 바꾸었습니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궁예가 신라를 멸망시키려는 그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궁예는 자신을 높이고, 스스로를 신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을 청광보살과 칭광보살이라는 높은 칭호로 부르며, 그들을 자신의 신성한 존재로 믿었습니다. 외출 시에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백마를 타며, 승려들에게 불가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의 웅장한 모습은 왕의 위엄을 표현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그의 교만함을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궁예는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지만, 그의 저서는 일반적인 도리에서 벗어난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교훈은 전통적인 가르침과 다르게, 그의 개인적인 이해에 기반하였습니다. 이를 듣고 불만을 표현한 승려를 궁예는 분노하여 죽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교훈에 반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915년, 궁예는 부인 강씨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의심하였습니다. 그는 강씨를 미워하며, 그녀가 다른 사람과 간통을 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강씨가 부인하자, 궁예는 자신의 신통력으로 그녀의 죄를 보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후 불타는 철봉을 강씨의 몸에 쑤셔 넣어 죽였고, 자신의 자식들까지 죽였습니다. 그의 행동은 궁극적으로 그의 폭력적인 성격을 드러냈습니다. 이후부터 궁예는 의심이 많아지고 분노를 터뜨리며, 측근과 장수, 관리, 평민에 이르기까지 반역죄를 더무늬 없이 꾸며 사들을 죽였습니다. 특히 부양과 철원 지역의 사람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매우 고통스럽게 느꼈습니다. 그들에겐 궁예의 절제 없는 행동은 참혹한 짓이었습니다. 궁예는 자신이 미래를 알 수 있다며, 음란한 짓을 저지른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하며, 그런 짓을 한 사람은 엄벌에 처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러한 궁예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큰 공포를 주었습니다. 그의 교만함과 잔인함은 사람들에게 끔찍한 혼란과 공포를 주었습니다. 궁예의 폭정은 그의 지배 아래에 있던 사람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음란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찾아내어 엄벌에 처한다고 선언하였고, 여성들은 그의 무자비한 처벌 아래에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런 궁예의 폭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배신하게 되었고, 이 중에는 현경 신숭겸과 복지겸 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왕의 자리에서 몰아냈습니다. 이후 왕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왕건의 편으로 가게 되었고, 궁예는 매우 놀라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산골짜기에서 머물며 생활하였고, 결국에는 허기진 상태에서 마을로 내려가서 보리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비참한 채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궁예의 행동이 왕권 강화 정책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며, 그의 폭정은 왕건이 반란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과장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에도 수많은 반란을 겪었고, 궁예를 지지하는 세력이 강력했던 청주 지역을 왕건이 회유하려 노력한 기록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궁예는 자신의 미륵신앙을 반발하는 석종을 폭력으로 처단하였고,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을 잔인하게 죽인 사실로 봤을 때, 그의 행동은 결코 군주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궁예는 신라를 멸망시키려 했고, 신라에서 항복해 오는 사람들까지 죽이며, 신라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를 드러냈습니다. 이런 행동으로 봐서 그의 통일의지는 부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건이 궁예를 꺾어서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면, 후삼국 시대는 생각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미국스타일 (2023-11-03 오전 1:17:52)

미국 남북전쟁을 떠올리면 먼저 떠오르는 대통령은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그렇다면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대통령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오늘 알아볼 제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입니다. 미국에서 유일한 독신 대통령이자, 남부와 북부의 갈등을 중지하지 못해 남북전쟁의 단초를 제공한 대통령입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미국의 제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791년 4월 23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머서스버그에서 살던 아버지 제임스 뷰캐넌 시니어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스페어 사이에서 11남매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제임스 뷰캐넌. 아버지 제임스 뷰캐넌 시니어는 1783년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결혼을 하고 잡화점을 열었습니다. 이후 상인, 농부, 부동산 투자자로 일하면서 그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교육을 무척 잘 받은 여성으로, 아이들의 교육에도 무척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임스는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상점에서 일하며 산수와 회계를 배웠고, 마을의 목사 밑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하다가 마을에 있는 학교로 진학해 본격적으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1807년, 17살이 된 제임스는 펜실베이니아 칼라일에 있는 디킨스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대학에 입학한 지 1년 만에 학교에서 난폭한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켜 정학에 이어 퇴학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기회를 얻어 다시 복학할 수 있었고, 이후에는 정신을 잘 차렸는지 1809년에 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평상시 토론을 잘하고 법률에 관심이 많았던 제임스는 본격적으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한 변호사 밑에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812년에 변호사 자격을 얻어 정식으로 변호사가 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해, 미영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제임스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군에 입대해 제대할 때까지 사병으로 군복무를 했습니다. 이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대통령이었습니다. 변호사로 성공한 그는 이후 민주당에 가입하며 정치인으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814년에 펜실베이니아 주의 하원 의원으로 처음 선출되었고, 이후 10년간 그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1821년에는 미국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무려 10년 동안 미국의 정치를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생활은 항상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남부와 북부 사이의 노예 문제에 대해 중립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점점 화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그의 중립적인 태도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남부에서는 그가 북부의 노예제도 반대론자들에게 끌려가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56년에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그 해 대선에서 승리하여 미국의 제15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 임기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는 남북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결국에는 1861년에 남북전쟁이 발발하였고, 그는 대통령 임기가 끝난 직후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대통령 임기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그는 그 후 많은 연구자들에게도 가장 성공하지 못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 역사의 중요한 시기에 대통령이었던 사실, 그리고 그가 노예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병사 신분으로 군복무를 마친 제임스는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변호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금세 능력 있는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며 재산도 빠르게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814년, 잘 나가던 변호사 제임스는 24살의 젊은 나이에 펜실베이니아 주 하원 의원에 선출되며 처음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그는 1816년에 한 무도회에 참석하다가 그곳에서 앤 캐롤라인 콜몬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앤은 철강 제조와 무역을 하는 거의 재벌급 집안의 딸이었는데, 앤의 부모는 제임스를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앤과 사랑을 이어갔고 1819년에 드디어 약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임스는 앤과 약혼을 한 이후 정치와 변호사 업무로 인해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어질 정도로 바빠졌습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저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제임스가 돈 때문에 앤과 결혼하려고 했다던가, 제임스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다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런 소문은 곧 앤에게도 들어갔고, 앤은 제임스에게 파혼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앤은 약혼을 파기하고 얼마 안 돼 1819년 12월 9일 약물 과다복용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앤의 모친은 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한때는 딸의 약혼자였던 제임스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도 막을 만큼 제임스를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제임스는 앤이 세상을 떠난 후 '행복이 내게서 영원히 사라진 것 같다'며 앞으로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죽을 때까지 독신을 유지한 미국 역사상 유일한 총각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제임스가 평생 독신을 유지한 이유에 대해선 다른 추측도 있습니다. 바로 전임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피어스의 부통령 윌리엄 킹과 특별한 사이였냐는 것입니다. 윌리엄 킹도 제임스처럼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던 사람이었고, 둘이 15년간 한 집에 살 정도로 사이가 무척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없었던 제임스는 대통령으로 있을 동안 조카가 영부인 역할을 맡았다고 합니다. 펜실베이니아주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던 제임스는 1820년 미국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10년간 재선에 성공하며 5선의원의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그는 1824년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앤드류 잭슨을 지지하며 선거운동을 돕게 되는데, 1828년에 드디어 앤드류 잭슨이 대통령이 되고 이후 1831년 제임스는 러시아 주재 미국 공사로 임명되어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첫 통상 조약을 협상하는 등 외교관으로 성공적인 변신을 하게 됩니다. 1833년 11월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후 이듬해 미국 상원에 선출되어 10년 가까이 상원의원으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상원의 임기가 끝날 무렵 제임스는 의회에서 가장 강력한 상원의원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후보를 뽑는 경선에서 제임스 포크에게 밀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대통령이 된 제임스 포크는 제임스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하게 되고, 국무장관이 된 제임스는 멕시코 전쟁으로 늘어난 영토를 가지고 영국과 협상을 벌여 국경을 정하는 오리건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제임스는 이후에도 1848년 대통령 선거, 18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1853년 미국 제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가 제임스를 영국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하게 되면서 제임스는 외교관으로 유럽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제임스에게 큰 기회로 돌아왔습니다. 제임스가 공사로 해외에 파견돼 있는 동안 미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노예제 문제를 두고 큰 갈등을 겪게 된 것입니다. 특히 1854년 프랭클린 피어스가 서명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는 극한의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미국의 분열된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취하지 않았던 제임스가 오히려 대통령 선거에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1856년, 제임스는 휘그당의 분열로 인해 비교적 쉽게 미국의 제15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857년 3월 4일, 67세의 제임스는 대통령으로 취임했는데, 그의 취임식은 미국에서 최초로 사진으로 기록된 취임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임스의 대통령 임기는 시작부터 어렵게 흘렀습니다. 대통령이 된 제임스는 자신의 사람들 위주로 내각을 구성해 민주당의 반발을 샀고, 특히 남부 출신과 남부의 호의적인 인물들을 채우면서 북부 지역 정치인들의 비난을 사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치명타가 도달했습니다. 미국 대법원은 미국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판결로 알려진 드레드 스콧 판결을 내렸습니다. 드레드 스콧은 미주리 출신의 흑인 노예였는데, 그는 주인을 따라 노예제 폐지 주의자들이 많은 자유주로 이동하면서 자신도 자유인이라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연방 대법원은 노예는 미국의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연방 법원에 제소할 권리 자체가 없다며 드레드 스콧의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이 판결은 노예제도를 합법화한 판결이었습니다. 이 같은 결과에 남부인들은 환호하며 노예 반대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북부인들은 이 시대착오적인 판결에 더욱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제임스는 드레드 스콧 판결을 지지하며 북부쪽 판사에게 이 판결을 지지하라며 은근슬쩍 압력까지 가했습니다. 사실 제임스 개인적으로는 노예제도를 반대했지만 헌법에 따라 연방정부가 마음대로 남부의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제임스는 일단 이렇게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면 모두 그 판결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쉽게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판결로 갈등이 해결되기는 커녕 더욱 심각해졌으며, 노예제 폐지를 가치로 내걸고 출범한 공화당은 이 결정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만 해도 신생정당이었던 공화당은 185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넓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무명에 가까웠던 공화당이 성장하게 된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정치인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 시기에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공화당은 제임스의 의제를 거부하고 제임스는 다시 공화당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연방정부는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1860년 대통령 선거가 열리게 되었는데, 민주당은 노예제 문제 때문에 북부와 남부로 분열돼 한 당에서 각각 다른 후보를 지명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결과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큰 표 차이로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러자 남부에서는 공화당 행정부를 인정하느니 차라리 연방을 탈퇴하겠다며 1860년 12월 20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를 시작으로 1861년 2월까지 7개의 남부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여 미국 남부연합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제임스는 남부의 주들이 탈퇴하는 것을 막을 헌법적 권한은 없다며 반감만 했습니다. 1861년 3월 4일 에이브러햄 링컨이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제임스는 펜실베이니아로 은퇴를 하게 됩니다. 얼마 후인 1861년 4월 12일, 남부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섬터 요새에 발포를 하며 남북 전쟁이 시작되는데요.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남부주의 분리를 막지 못한 제임스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며 제임스를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상원은 제임스를 규탄하는 결의안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으며, 제임스의 초상화가 훼손되는 걸 막기 위해 국회의사당에서는 그의 얼굴을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자 제임스는 우울증에 빠질 정도로 힘들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862년,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반란 이전에 뷰캐넌 행정부'라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회고록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1년 후인 1866년에 출판되었지만,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했습니다. 실망한 제임스는 이후 집에서 은둔하며 친한 친구들만 만나며 살아가는데요. 그러다 1868년 6월 1일,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제임스는 남북 전쟁의 원인이 된 대통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제임스는 남북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남북 전쟁에 큰 원인을 제공한 무능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제임스는 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그는 퇴임 후 남부에서 노예를 사들여 북부에 해방시켜주기도 했으며,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등의 관대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무능력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로 인해 그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8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대통령이자 유일한 독신 대통령인 제임스 뷰캐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인물로 기억됩니다.